
[참좋은뉴스= 김태형 기자] 석양이 물드는 시흥 오이도 바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애절한 색소폰 선율이 지나가던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주인공은 이곳에 거주하는 김회인 선생(77세)이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바닷가를 찾아 색소폰을 연주한다. 매년 4월이 되면 수많은 곡 중에서도 그가 경건한 마음을 담아 연주하는 곡은 세월호 비극 「천 개의 바람이 되어」이다. 딸의 권유로 이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다는 김 선생은 노래에 우리 사회의 아픔을 담아낸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덧 십 수 년이 흘렀고, 그사이 이태원 참사도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책임 있는 이들은 회피하기 바쁩니다."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그는 "육신은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 자유롭게 날고 있다는 노랫말처럼,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전해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며 다시 악기를 입에 물었다.
오이도 바람을 타고 번지는 그의 연주는 평생에 걸친 시련을 극복해 낸 한 노장의 자전적 고백이기도 하다.
최근 김회인 선생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70여 년 인생사를 고스란히 담아낸 자서전『신의 계시』를 세상에 내놓았다. 책 속에는 가난과 신체적 장애라는 모진 풍파를 딛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낸 감동적인 서사시가 펼쳐진다. 진정한 어르신의 면모를 보이는 김회인 선생. 책을 통해 그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죽음보다 싫었던 가난, 그리고 소년의 꿈과 좌절
김 선생의 유년 시절은 순천의 피난민 난민촌 오막살이에서 시작됐다.
아홉 식구가 전기와 수도조차 없는 좁디좁은 곳에서 뒤엉켜 살았고, 점심을 굶고 찬물로 허기를 달래는 날도 적지 않았다. 가난 속에서도 11살 소년은 유독 글씨에 재능을 나타내며 꿈을 키웠다. '공부는 광주서중,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나와 판사가 되는 고등고시가 최고'라는 선배들의 말을 귀동냥으로 듣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수첩에 헌법을 적어 외우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너무도 일찍 찾아왔다. 6·25 전쟁 중 앓았던 눈 다래끼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얼굴에는 험상궂은 흉터가 남았고, 초등학교 시절 환경조사를 통해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중학교 3학년 초 봄에, 선배들로부터 "얼굴의 눈 흉터 때문에 고등고시 자격(신체검사 등)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조언을 들은 그는 큰 실망 끝에 결국 학업을 스스로 포기한다.
17세 직업전선 투입, 기술로 가난을 뚫다
"가난은 죽음보다 무섭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17세 소년은 무임금 꼬마 생활을 감내하며 전자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왼쪽 귀 청력 장애와 색맹(색약)이라는 기술직으로서의 치명적인 약점이 발목을 잡았지만, 장애쯤은 무시하고 대신 계측기를 활용하고 피눈물 나게 기술을 터득했다.
18세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한국 TV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19세에 직접 라디오를 조립해 월부 장사에 나섰고, 21세에 마침내 고향 순천에 자신의 전파사를 개업하며 '사장님'이 되었다. 돈을 모으자마자 종로의 유명 정형외과를 찾아가 평생의 한이었던 눈 흉터 성형수술을 감행한다. 비극의 외모가 긍정의 아이콘으로 바뀌며 인생의 대반전이 시작된 장엄한 순간이었다.
"리어카를 끌어도 뒤에서 밀어주겠소!"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은 23세에 중매로 만난 아내 許 씨였다.
맞선 자리에서 청년 김회인이 "내가 만약 천한 리어카를 끌어도 뒤에서 밀어줄 수 있느냐"라고 묻자, 처녀는 서슴지 않고 "네, 밀어줄게요."라고 답했다. 이 한마디가 결혼 조건의 전부였다.
아내의 지극한 내조와 사주철학가의 장담(사주)대로 그의 삶은 급반전을 거듭했다. 부단한 노력으로 서른 살에 서울 강남에 점포를 매입하고 청담동에 신축 빌라를 장만하며 자녀들에게 피아노와 컴퓨터를 선물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색약 체질 때문에 세 번이나 낙방했던 운전면허시험도 끈질긴 집념으로 취득해 내며 "포기란 없다"는 인생철학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길 위에서 깨달은 도(道), 이제는 바람이 되어
21세 시절, 자신이 조립한 거대한 전축을 리어카에 싣고 순천 남문다리를 당당하게 건너던 순간, 그는 삶의 거대한 진리를 단박에 깨달았다고 회고한다. "귀하고 천한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뒷면처럼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깨달음(돈오돈수)이었다.
생활이 안정되자 소년의 꿈을 실현하고자 32세의 나이에 덕유산 암자로 도망치듯 가서 염원인 고시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도 했으나, 폭설을 뚫고 찾아와 만류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하산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어쩜 최고의 선택이었다며 미소를 짓는다.
"몸은 늙어 시들었으나 마음은 그대로니 다행"이라는 김회인 선생.
모진 시련의 세월을 견디고 일어나 이제는 오이도 바닷가에서 세상의 슬픈 영혼들을 달래는 그의 색소폰 소리가, 그가 출판한 책 『신의 계시』와 함께 더 많은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의 바람으로 퍼져나가길 기대해 본다.














